![1-17[1]](https://neverpage.co.kr/wp-content/uploads/2017/08/1-171.jpg)
4.29 시민봉기(4.29 Civil Uprising)라고도 불리는 사건.
1992년 4월 29일부터 5월 4일까지 미국 LA에서 벌어진 일로 미국 역사상 12번째 흑인 폭동이다.
비단 흑인 뿐만 아니라, 온갖 차별로 인해 소외된 히스패닉계까지도 가세했었다.
폭동의 발단은 1991년 3월 3일 로스앤젤레스 고속도로 순찰대 소속의 백인 경찰관 4명이 고속도로를 타고 과속(115mph, 185km/h)으로 달리던 운전자 ‘로드니 킹’을 붙잡는다.
로드니 킹은 경찰에게 거칠게 행동했는데, 경찰은 이에 폭력으로 대응한다.
당시 경찰은 로드니 킹이 마약인 PCP를 복용하고 매우 거칠어진 상태였다고 주장했는데, 여러번 마약 검사를 실시했으나 모두 ‘음성’으로 나왔다고 한다.
다만 로드니 킹은 당시 강도, 폭행, 절도 등의 범죄를 저지르고 가석방 된 상태였는데, 만약 잡힐 경우 가석방 조건에 걸려 도로 수감되어야만 했기에 거칠게 행동했다고 밝혔다.
한편 로드니 킹이 폭행당해 피투성이로 경찰서에 끌려가게 되는 장면이 인근 주민의 비디오 카메라에 담기는데, 다음 날 이 테이프는 81초에서 61초로 편집된 채 뉴스에 보도된다.
편집 된 장면은 ‘로드니 킹이 경찰에게 위협적으로 저항하는 장면’이기에 이를 본 흑인들은 분노했고, 재판에 선 4명의 경찰관 중 1명은 재심사 3명은 무죄로 판결나자 길거리로 나와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시위는 곳곳에 방화 및 약탈, 총격전이 벌어지는 폭동으로 변해간다.
당시 SWAT의 창설자인 게이츠 총경은 ‘정치자금모집을 위한 집회’에 참여하느라 초동진압 시점을 놓쳤는데, 후에 직위해제 그리고 ‘이그노벨상’ 평화상을 수상받는다.
폭동이 미국 언론은 이 사건을 1991년 3월 16일 흑인 빈민 지역인 남부 로스앤젤레스에서 발생한 ‘두순자사건’과 연계해 보도하면서 한국인과 흑인 사이의 인종 갈등을 야기하며 폭동을 악화시켰다.
특히 폭동이 일어난 지점과 그 인근에는 수많은 한인 타운이 있었음에도 경찰은 ‘백인거주지역’으로 가는 길만 막고 ‘한인지역’으로 가는 길은 그대로 열어 놔 흑인들이 한인 지역으로 몰려가도록 만들었다.
미국이 자신들을 버렸다고 느낀 한인들은 스스로가 자신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징병제로 인해 대부분의 성인 남성이 군대 경험이 있었고, 더 나아가 한국 전쟁 참전 경험이나 베트남 전쟁 참전 경험자들이 있었기에 경험을 살려 가게 옥상에서 사주경계를 서는 등 효율적인 방어태세를 취했다.
게다가 나무나 플라스틱 모형을 만들어서 마치 기관총이 있는 것처럼 꾸며 폭도들의 기를 죽이게 만들었다.
실제 기관총이 있다는 것을 신고받고 출동한 미국 경찰들이 가짜라는 걸 깨닫고 그 발상에 감탄했다고 한다.
한편 이 사건으로 한인사회는 상당한 피해를 입었는데, 최종적으로 집계된 피해는 최소 3억 5천만 달러, 2,300여개의 점포손실이 있었고, 가게 주인 5명이 목숨을 잃었다.
Leave a Reply